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 마사요시 (문단 편집) === 한국과의 관계 === * 어릴 땐 한동안 [[재일교포]]로서 받은 차별 때문에[* 어릴 적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동네 아이들에게 돌을 맞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름도 일본식으로 쓰며 꽁꽁 숨어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콤플렉스를 더더욱 키울 뿐이었단걸 깨닫고, 아버지가 입원하시고 본격적으로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미국]] 유학을 가기 전 할머니에게 부모 고향에 한번 데려가달라고 부탁했고, 10대였던 1972년 가을 할머니와 함께 생애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고 한다. 당시 손정의는 자신이 사업가가 된 계기와 시골이었던 당시 부친 고향의 기억을 2010년 6월 [[소프트뱅크]] '신 30년 비전 발표회'에서 언급하기도 했다.[[http://www.youtube.com/watch?v=gW_wWxAzEEs|#]] * 이후 손 회장은 1974년 자신의 성을 '야스모토'(安本)에서 '손'(孫)[* 한국 한자음 뿐만 아니라 [[일본 한자음]] 음독인 한음과 오음으로도 '손'이라고 읽는다.]으로 바꿨다. [[미국]] 유학 시절 어학원과 UC버클리를 [[캠퍼스 커플|같이 다닌]] 2살 연상의 오노 마사미[* 오노 유미, 마유미라는 이야기도 있다.]와 결혼하였으며 이후 두 딸을 낳았다. 하지만 역시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사업]]을 하긴 여러 애로 사항이 많았고, 결국 1990년엔 일본으로 귀화했는데, 당시 일본에는 손씨가 없다는 이유[* 정확히는 '손씨는 [[일본인]]의 성씨로써 걸맞지 않다(相応しくない)'라는 이유.]로 귀화를 받아주지 않자,[* 다만 현재는 법률이 바뀌어서 일본식 성으로 바꾸지 않고도 귀화가 가능하다.] 아내를 손씨로 바꾸는 편법을 써서 손씨 성을 지키며 귀화했다. 사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론 일본도 결혼 후 부인이 남편 성을 따르는[* 과거에는 무조건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라야 했으나, 현재는 남편이나 아내 성 둘 중 아무거나 원하는 성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물론 현재도 사회 분위기상 아내가 남편 성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 게 사실이긴 하지만. 데릴사위와 같이 아내 집안의 자손을 이어야 하는 경우는 아내의 성을 따른다.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라야 했던 과거에는 이 경우 장인이 사위를 입양해서 자신의 성을 물려주는 [[서양자]] 제도가 존재하기도 했다. 일본은 의붓남매간의 혼인이 가능하기 때문. 물론 [[일본인]]끼리의 결혼은 성을 어느 한 쪽으로 통일하는 것이 법률로 정해져 있지만, 일본인과 외국인이 결혼한 경우는 성을 바꾸는 건 강제가 아닌 자유다. 단, 한번 바꾸면 이혼을 하지 않는 이상 간단히 되돌릴 수는 없다. 대신 소정의 절차를 거쳐서 신분증을 비롯한 각종 공식적인 서류에 결혼 전의 구성(旧姓)을 표기할 수 있다.] 동성동본이 일반적[* 일본인끼리의 결혼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경향이 아니라 법률로 정해져 있는 강제사항이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 한국어는 거의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한국 외의 국가뿐만 아니라 한국에 왔을 때에도 영어를 쓴다. 그래도 상대방이 말하면 어느 정도 알아는 듣는다고. 어릴 적엔 [[재일교포]]로서 당한 차별 때문인지 본인 스스로도 출신에 대한 것을 철저히 숨기고 살아왔기 때문에 언어를 습득할 기회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을 미워하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며, 그가 성씨를 한국의 성인 "손"으로 한건 할아버지,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라고 밝히기도 했다.[[https://web.archive.org/web/20191030065414/https:/twitter.com/masason/status/9834785755|#]] * 확실히 손 회장은 어릴 적 자신처럼 일본에서 차별당하고 살고 있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동질감과 애정이 커보인다. 자신이 성을 다시 한국 성씨인 손으로 바꾼 이유도 한국 자체에 대한 애정도 일부는 있겠지만 더 크게 보면 재일교포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 [[사업가]]가 된 이후에도 한국에 종종 내한했는데, 1998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하여 [[빌 게이츠]] 회장과 함께[* 손정의와 빌 게이츠는 친구이며 함께 논의하기 위해 데려갔다고 한다.] 방문해 초고속 브로드밴드 [[인터넷]]의 중요성을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21000099106003&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8-02-10&officeId=00009&pageNo=6&printNo=9980&publishType=00010|얘기했고]], [[https://www.youtube.com/watch?v=LQynxZcjGc4|이것이]][* 6분부터.] 오늘날 한국 인터넷 망 구축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물론 당시 초고속 인터넷망의 필요성은 손정의만 얘기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옛 고향의 발전에 신경쓰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상술했듯 2019년에도 문재인 대통령에게 [[인공지능|AI]] 산업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줬고, 2010년대 초중반에도 자신의 [[신재생에너지]] 사업 관련 구상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 본인의 신재생에너지 사업 관련해서 한국에 내한해 [[이재용]] 등 여러 [[기업가]], 정치인들과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쿠팡]] 등 한국 신생 기업에 대한 투자와 대기업들과의 제휴도 활발한 편이다. * 2011년부터 2016년까지 대구 [[이재만|동구]][[강대식|청장]]과 공무원들이 무료로 손정의의 조상묘를 [[벌초]]해주기도 했다. 당시 구청은 손정의의 고향이 대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벌초해준 것이라 했는데,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이 있었다. 그리고 역시 연장선상인지 2010년에는 초청장도 보내보고, 2012년에는 벌초 장면을 촬영한 DVD까지 선물로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6&aid=0000532541|#]] 이런저런 이유 때문인지 결국 2016년을 전후하여 벌초를 중단하였다.[[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90704/96326289/1|#]] * 한때 한국 모 언론에서 [[iPhone]]은 원래 손정의의 아이디어였다는 기사를 내서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 적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해당 기사는 단순한 대화 내용을 전한 것인데다가 출처가 불분명하고, 기사의 대화 내용을 보면 [[스티브 잡스]]도 "외부에서 그런 얘기를 한 것은 마사(손 마사요시)가 처음이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지금 여러 방면으로 생각 중이다."라고 했다고 하니 이미 애플도 내부에선 그런 식의 아이디어가 나와 있었다는게 된다. 게다가 iPhone 발표에선 [[iOS|iPhone OS]] 개발에만 수년을 투자했다고 하니 사실 손정의가 iPhone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건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 낚이지 말자.[* 그 이전에도 세계 최초의 [[스마트폰]]은 삼성 MITS이고, [[앱스토어]] 모델의 수익 구조도 [[삼성]]의 모 부회장이 먼저 생각해두었던 것인데 구글과 애플에게 뺏겼다는 식의 기사가 올라와 삼성빠들을 감동먹인 적이 있었다. 저걸 지금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이 많다.][* 보통 대중적인 스마트폰의 시작이라 하면 노키아의 심비안과 RIM의 블랙베리 둘로 뽑는다. 이후 블랙베리 등 기존 스마트폰의 부적절한 UI를 개선하여 현대적인 스마트폰을 완성한것이 [[아이폰]]. 스티브잡스는 아이폰의 첫 프레젠테이션에서 '아이팟', '전화기', '인터넷'을 하나의 기기로 합친 상품이라고 주장했는데, 피처폰을 사용하던 시기에도 휴대전화의 작은 용량에 음악 파일을 넣어서 재생은 가능했기에 이미 순수 MP3 플레이어에서 통합기기로 세대교체가 되는 중이었다. 즉 잡스가 말한 '아이팟'과 '전화기' 의 결합이 어느정도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아이폰의 진정한 혁신은 '터치스크린' 을 통한 멀티터치 UI를 통해 사용하기 정말 편리한 IT기기를 인류에게 소개하고 성공적으로 보급한 것이며, 스마트폰이라는 개념 자체를 애플이나 특히 손정의가 착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손정의가 'iPhone for everybody'라는 정책을 펼쳐, 갈라파고스화가 심한 일본 휴대폰 시장에 iPhone 보급에 큰 기여를 한 것은 맞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